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9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다.
이 비유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듣는 자는 상대적으로 자신을 종교적으로 의롭다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낮게 여기며 멸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앙이 깊어지면 내 신앙의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볼링을 좀 치는 편인데, 40대에 평균 200점이 넘었고 180점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볼링을 다시 시작하면서 200점을 향해 가는 시점에 코로나19로 더 이상 칠 수 없게 되었다.
볼링을 잘 못 치는 사람은 “나 오늘 스트라이크 두 번 나왔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잘 치는 사람은 스트라이크가 몇 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 안 되지?’를 고민한다.
어느 날 볼링을 치는데 연속으로 스트라이크가 나왔다.
옆에서 볼링을 치며 떠들던 학생들이 조용해졌고, 나를 점점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보니 마지막에 실수를 해서 287점으로 마쳤다.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스트라이크 하나를 놓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 자세가 무너져서 제대로 못 쳤다는 것이다.
신앙의 고수는 큐티를 했는지 안 했는지, 봉사하는지 안 하는지를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갈지를 고민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내 점수가 몇 점인지에 더 관심을 둔다.
내 신앙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을 가질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0-12
그런데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언급하고 비교한다.
종교적인 기도의 특징은 “내가 했습니다”, “안 했습니다”, “필요합니다”라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말들만 나열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에 가장 큰 문제는 경건의 모양만 있다는 것이다(딤후 3:5).
마지막 시대에 흔들리는 신앙은 경건의 모양만 있다.
모양만 있다는 것은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야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관계가 없으니 피상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삶의 문제를 나누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삶의 문제를 기도하되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일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누는 사람은 친한 사람이 아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별걸 다 알고 있다.
하나님과도 피상적으로만 이야기하며 “주세요”, “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세세히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신앙이 깊어지면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했으니 그만해도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짜 사랑하면 더 만나고 싶고, 더 주고 싶고, 줘서 기쁘고, 손해 봐도 기쁘고, 참아서 기쁘고, 어려워서 기쁘다. 이런 것은 사랑밖에 없다.
바리새인의 경건은 외식에 불과하다. 도리어 마지막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를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 보인다. 세리가 하나님을 바라본 순간 그는 하나님의 거룩을 느끼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백하게 된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겸손은 겸손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겸손할 수 없다.
겸손해 보이려고 한 말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겸손은 내가 가진 것을 누가 주었는지 알고, 누가 가져갈지를 알 때 나온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 때, 주권자를 알 때 겸손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보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인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주권자가 하나님이신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이다.
마지막 때는 세리처럼 겸손한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으면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게 된다.
비교는 사탄이 주는 마음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비교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
마지막 때는 비교할 것이 많다.
시대가 불의해서 불의한 재판장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불의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자꾸 비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비교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이다.
마지막 때 우리는 불평과 불만으로 무너진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억울한 과부가 믿음을 가지고 불의한 재판장에게 갔던 것처럼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마지막을 버틸 수 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을 놓치면 다 놓쳐버리게 된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이다.
불의한 재판장 같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이 불의한 시대에 자신의 신앙을 꼭 지켜야 한다.
-준비하고 있으라, 김남국
† 말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_누가복음 18장 13-14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_시편 37:7
† 기도
주님, 주님은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시고 우리는 사랑하므로 인해 다 주셨는데 우리는 비교함으로 사랑이 아닌 불평과 불만의 말을 입으로 뱃어내는 것을 회개 합니다. 주님 마지막 때에 주를 바라고 구하므로 인하여 정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적용과 결단
비교할 때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면 교만이 그렇지 않으면 불만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오직 주님과의 관계가 견고하여 질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세워가는 하루 되길 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