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의 현재 모습 그대로 대하라. 그러면 그 사람은 현재 모습 그대로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장차 될 수 있는 모습과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대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향유 옥합을 바친 여인에게 이 여인이 부응해야 할 무언가를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prophets,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과 정반대다. 그들은 수군댔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눅 7:39)
바리새인들이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들의 눈에는 그녀가 죄인이라는 것만 보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소녀, 그 당시 살아가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꿈과 희망을 가진 소녀를 보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우리의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신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신의 형상을 보신다.
바리새인들은 과거의 행동을 토대로 사람들을 대한다. 예언자들은 미래의 잠재력을 토대로 사람들을 대한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만회해야 할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부응해야 할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바리새인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기억에서 삭제한다. 예언자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기억에 입력한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본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포기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두 번째 기회를 준다.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에게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성적(sexual), 종교적 꼬리표를 붙인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서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갖는 개성과 다양성을 빼앗는다.
한 사람의 인간이 우리가 붙인 꼬리표 하나만큼이나 작아진다. 편견(prejudice)은 미리(pre) 판단하는 것(judging)이다. 편견은 나쁜 이야기는 결국 나쁘게 끝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비록 시작이 잘못되었더라도 “이후로 영원토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결말로 바꾸는 일을 하신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그렇게 하셨다. 십자가 오른편 강도에게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못하신다. 당신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당신이 사는 날 동안 당신을 따를 것이다.
† 말씀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히브리서 10장 17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빌립보서 1장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시편 23장 6절
† 기도
주님 제 안에 죄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마음들과 편견을 내려놓고 회개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에 부응하며 살길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죄로 인해 억눌린 마음이 있습니까? 정직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세요. 죄를 사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에 부응하는 삶 살기로 결단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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